[열린광장] 1960년 4월19일의 기억
어김없이 올해에도 4월이 되면 1960년 그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65년 전 4월 19일의 충격과 벅찬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정오를 향해 치닫던 그날 오전, 서울 사대 물리과 2학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데모대의 선두에 섰다. 마지막 철조망과 허리 높이의 시멘트 토관 앞에서, 굳건히 경무대를 지키던 권력과 마주한 그들의 눈빛은 결연하기만 했다. 순간, “빠방” 하는 섬뜩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젊음, 졸업을 앞둔 국어과 4학년 학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4.19 희생자 1호라는 비극적인 이름표가 그의 젊음에 새겨졌다. 연이어 체육과 4학년 학생마저 목숨을 잃었고, 가정과 여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대한민국은 또다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총격은 ‘피의 화요일’로 기록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 특히, 서울 문리대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의 이야기는 깊은 슬픔과 함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었음에도, 그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 학생에게 수혈 기회를 양보하고 스러져 갔다. 그의 헌신은 당시 4.19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하고, 4.19 희생자들은 서울 북방 우이동의 묘역에 영면해 있다. 당시 2학년으로 사대 신문 주간을 맡았던 나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뜨거운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갔던,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 4.19의 주역들은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와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이끈 현대화의 주역이 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 그해 여름,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농촌 계몽 운동을 계획했다. 당시 사대 학생회장은 법대에서 사회학과로 전과한 최영상 군이 맡았고, 사대는 전라남북도를 담당했다. 전주에 본부를 둔 학생회 소속이었던 나는 물리과 3학년 동기들(임장규-전 문교부 장학관, 유경근-전 서울시립대 교수, 이창무-캐나다 이민)과 함께 귀한 영사기를 마련했다. 공보부와 미국 USIS에서 어렵게 빌린 뉴스 필름을 들고, 우리는 전주를 시작으로 이리, 익산, 정읍, 장성, 담양, 순창, 남원, 장수, 장계를 순회하며 밤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지방은 전기와 전화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경찰서뿐이었고, 우리는 경찰서의 경비 전화를 빌려 사용해야 했다. 3일장, 5일장이 끝나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 8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기다렸다. 버스도 흔치 않아, 영화가 끝나면 칠흑 같은 밤길을 몇십 리씩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영사기 불빛에 비춰보면 아이들과 남자들뿐 아니라, 이웃 동네 아낙들까지 모두 나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농촌 사람들에게 영화는 귀한 볼거리였고,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담양을 지나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검은 교련복을 입은 우리 학생들을 불러 세운 한 분이 계셨다. 6.25 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와 담양에 정착해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분은 시원한 냉수를 건네주셨다. 잠시 후, 그분은 신문지에 싼 두 개의 뭉치를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 지금 시세로 따지면 작은 가게 하나를 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학생들의 농촌 계몽 활동에 써달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학생들 등록금이 몇 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큰돈이었다. 시골에서는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의 후한 인심에 감탄했지만, 우리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계몽 운동을 한다면서 돈을 받고 다닌다는 오해가 생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완강하게 돈을 받으라고 권하셨고, 우리는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돈을 받지 않고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해, 학생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기차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방 면장은 물론 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평생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이었고,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시절의 한 페이지였다. 6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뜨거웠던 함성과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주영세 / 은퇴목사열린광장 기억 단과대학 학생회장들 4학년 학생 사대 물리과